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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23일 금요일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hanatos)의 공존

제 블로그의 메인 주제이기도 한 생(生)의 의지로서의 에로스(Eros)와 죽음과 파괴(死)의 충동으로서의 타나토스(Thanatos)의 대립과 공존을 다루는 작품들에 대한 소개입니다. 예전에 올렸던 포스팅을 약간 가필하여 복원합니다~

슈베르트의 가곡 <죽음과 소녀>의 가사는 18세기 후반 독일의 시인 클라우디우스(Matthias Claudius)가 썼다고 합니다. 

가! 저리 가! 두려운 죽음이여!
나는 아직 젊어.
저리 가! 나를 만지지 마!

손을 다오, 아름답고 순진한 아가씨.
나는 너의 친구야. 너에게 벌을 주러 온 게 아니란다.
두려워 할 것 없어. 내 품에서 편히 잠들게 해 주마.

사신(死神)을 떨쳐내려는 소녀의 저항과 그녀를 구슬리는 사신의 대화가 나타난 마무리 장면인데요.
여성(소녀)으로 대표되는 사랑/생명의 상징 에로스(Eros)와 사신으로 대표되는 죽음/소멸의 상징 타나토스(Thanatos)는 시나 음악보다도 회화사에서 다양한 변주를 거치며 발견돼 온 주제에요.  

르네상스 시대 이전의 누드에서는 에로스와 타나토스 간의 관능적인 긴장감이 발견되지 않는데요. 중세 종교미술에서의 누드화는 죄에 대한 징벌의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한 누드로서 에로티시즘은 궁극적으로 죄악의 영역에 해당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누드화를 바라보는 관찰자가 도착적인 시선을 갖기 이전에 공포를 먼저 지각하는, 즉 종교화에서의 누드란 현실적인 인간의 삶과 직결된 성의 표현은 아닌거죠.


대표적인 중세의 종교화로 디에릭 부트의 <최후의 심판 중 지옥>과 같은 작품을 예로 들수 있겠네요.


<The Fall of Damned>, Dieric Bout, 1450

암울한 지옥도를 보여주는데요. 불을 뿜는 바위산 위로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사실은 육신을 입은 것으로 표현된)들이 묘사되어 있네요. 추락하는 육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지만 삐적마른 앙상한 육신이고 남성적인 육체가 많군요. 화면 가운데 위치한 여성의 육체도 풍만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빈약함과 공포로 인해 자신을 눈을 손가락으로 파내고 있는 - 차라리 안 볼란다~ 하는게 마음이 편한 상황일까요? - 끔찍한 장면으로 에로틱한 시선을 허락하지 않고 있네요.


그런데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신화나 기독교적 주제의식보다 인간 신체와 감정에 대한 표현이 강조되면서 에로틱한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하죠. 성적 매력을 지닌 젊은 여성과 죽음을 환기시키는 병든 노년의 남성 혹은 명시적인 사신을 병치시킴으로 에로티시즘과 기독교적 도그마를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공포스러움보다는 사신에 의한 여성의 희롱 혹은 유린을 통해 죽음의 공포 혹은 삶/젊음의 허망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어요. 에로틱한 긴장감 속에서 타나토스의 서늘함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 작가가 의도한 바로 그것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16세기초 한스 발둥 그린(Hans Baldung Grien)의 작품이 바로 에로스/타나토스 류의 선도적인 작품일 거에요. 


<The Death and the Woman>, Hans Baldung Grien, 1517


<Young woman and the Death>, Hans Baldung Grien, 1517
이처럼 사신이 명시적으로 드러나 젊은 여성을 강제하는 작품 외에도 다비드의 <바라의 죽음>에서와 같이 고전주의 안에서도 젊은이의 육체와 죽음을 연결시킨 이미지가 있었지요. (얼굴은 여성스럽지만 청년/소년 '바라'입니다)
<The Death of Bara>, Jacques Louis David, 1794


인류의 원죄와 연결된 팜므 파탈(Femme fatale)도 있죠. 남성에 의해 그려진 남성을 위협하는 섹슈얼리티로서의 여성. 중세에서 빅토리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억압되어 왔던 성에 대한 금기는 19세기말부터 금기에 대한 위반(viollation)과 도착(perversion)이라는 형태로 터져나온 것 같군요. 

<The Sensuality>, Franz von Stuck, 19C 후반

<The Sin>, Franz von Stuck, 1896
작품 제목이 <Die Suende>, 즉 원죄라고 붙어 있군요. 죄의 열매는 사망이라는 성경구절을 되뇌이지 않아도 좋을만큼 여성의 몸을 감고 있는 거대한 뱀의 몸뚱이와 공격적인 이빨은 충분히 악마적이고 퇴폐적입니다. 정면으로 드러난 창백하리만치 빛나는 육체와 보일듯말듯한 분홍색 유두, 그늘진 속에서 눈빛만 빛나는 여성은 이미 죽음을 거부하는 여성이 아니라 뱀과 한 편이 된 요부(팜므파탈)의 모습에 다름아니죠. 

<Temptation of St. Anthony>, Felicien Rops, 1878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이라는 주제는 펠리시앙 롭스 외에도 여러 화가들이 즐겨 사용한 소재인데요..  기원후 4세기 경의 금욕주의적 은둔수사였던 안토니우스를 악마가 여러가지 환상으로 유혹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지요. 안토니우스 수사는 여러가지 유혹에서 승리했다고 전해집니다만, 화가들의 입장에서는 종교적인 코드를 입힌 에로틱한 이미지로 사용하기 좋은 소재였을 거에요. 붉은 망토를 한 악마가 그리스도를 대체하는 에로스의 화신으로서 풍만한 육체의 여성을 내세우며 성자를 유혹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십자가상의 여성과 고뇌하는 성 안토니우스이지만, 주변을 날아다니는 해골 (원래는 날개달린 푸토들이 있어야 하겠지만)과 개를 닮은 돼지 등을 배치하여 죽음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육체적인 것이 세속적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듯 하네요.  성 안토니우스가 보고 있는 책에 있는 내용을 확인보려 했지만 이건 해독 불가.. 혹시 아시는 분 있으면 힌트를 좀 주시기 바랍니다.


<Death and the Maiden>, Edvard Munch, 1894
<절규>로 널리 알려진 뭉크의 작품입니다. 유화 작품을 위한 아이디어 차원의 습작이 아닐까 추정됩니다만, 저는 완성된 유화작품보다 거칠게 그려진 이 작품이 더 와닿네요. 해골과 깊은 키스를 하는 젊은 여성의 모습에서 삶의 한꺼풀 뒤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죽음이 느껴지지 않나요? 그림 주변으로는 정자와 태아의 모습까지 낙서처럼 대~충 그려놓았군요. 19세기말의 세기말적 불안감도 함께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Death and the Maiden>, Egon Schiele, 1915

위 작품은 많이 알려진 에곤 실레의 <죽음과 소녀>라는 작품인데요.. 실레의 통속적이면서도 가슴아픈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그림 속의 모델이 된 여성은 발리라는 소녀로, 최하층민의 아름다운 소녀로 실레의 애인이자 전속 모델이었다고 합니다. 실레는 인기가 올라가자 부르조아의 여성과 결혼하여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겠다고 마음먹고 실천에 옮깁니다. 발리에게 이별을 고하기 직전에 그린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고요.. 실제로 이후에 발리는 충격을 받고 떠나며 종군간호사로 지원해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속으로 들어가 2년후에 전선에서 사망했다고 하네요.  그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스물 세살..

실레는 그럼 행복했느냐.. 그것도 아니었어요. 결혼한 아름다운 아내 에디트가 임신을 하고 모든 것이 잘 풀려가는 듯 했지만 발리가 죽은 다음해에 당시 전지구를 휩쓸었던 스페인 독감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임신한 아내도, 그리고 실레 자신도 그만 사망하고 맙니다. 1년 사이에 발리와 실레 가족 모두가 세상을 뜬 황당한 일이 벌어진거죠.


저는 이 작품에서 실레의 눈망울에 이미 깃들어 있는 죽음의 공포를 보았어요. 예술가는 Vision을 보고 환상을 본다고 하죠. 어쩌면 자신에게 닥칠 비참한 최후를 예견했을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저 때는 발리를 떠나보내는 죄책감의 표현이었을지 모르겠지만요.. 실레가 발리에게 못된 짓을 한 벌을 받았다고 볼수 있기도 한 것은 다음 작품의 존재인데요..


<Family>, Egon Schille, 1918

그가 사망하기 직전, 아내 에디트가 임신한 후, <가족>이라는 상상화를 그립니다. 태어날 아기를 포함한 자신의 가족을 그린 대작인데요. 아 한가지.. 실레는 위악적이고 굴절된 나르시시트였다고 해요. 그 얘기는 자화상이 실물과 반대 이미지라는 것이죠. 본인의 자화상을 100점을 넘게 그렸는데, 대개 늙고 추하고 비실비실하고 극히 작고 가느다란 성기, 혹은 지나치게 큰 성기를 드러낸 왜곡된 이미지로 본인을 그립니다.  하지만 실제의 그는 굉장히 잘생기고 멋쟁이 청년이었다고 하네요. 소위 꽃미남이었던 거죠.  같은 해에 이 그림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타나토스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작품이 됐죠.

오늘 아침엔 몇 작품에 나타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오면 특히 초현실주의에 이르러 이런 주제들이 회화 뿐만 아니라 조형미술이나 사진에도 확산돼죠. 그러면서 표현은 더 직설적이기도 하고 퇴폐적이기도 하고.. 기성의 관념과 터부를 깨는 쪽으로 전개되지요.  보기에 따라서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혐오나 공포에 가까운 집착,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파괴적인 양상을 보이는 등 페미니스트의 항의를 받기도 하는 여성혐오 양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양상은 별도의 포스팅으로 소개할까 해요. 일견 도착적으로 보이는 주제들이긴 합니다만, 배경을 알고보면 수긍이 가고 해석이 가능한 것들이 있거든요.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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