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과연 올까라고 걱정하던 것은 다 옛 이야기가 된
1911년의 봄이었죠.
이미 오스트리아 화단의 큰 기둥이신 클림트 선생님의 화실에 속한 저
발리(Wally Neuzil)는
다른 모델들과 함께 화실일도 돕고 잔심부름도 하면서 지내고
있었어요.
17살 처녀의 가슴은 봄의 향기에 취해 더없이 부풀어 올랐고 세기말의 위기를 넘긴 오스트리아의 수도는 활기와 퇴폐함이 거리에
흘러 넘치고 있었죠.
제가 운명의 남자를 만난 건 바로 1911년 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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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 Portrait with hand to cheek>,
Egon Schille,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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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형 나쁜남자의 전형처럼 거들먹 거리게 그려놨네요.
항상 자신을 위악으로 감추고 자화상에서조차 나약하고 병약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왜곡하던 남자. 빛나는 젊음과 예술혼을 무기로 더없이 당당하고 아름답게 빛나던
21살의 그를 저는 클림트 선생님의 화실에서 만났죠.
클림트 선생님께서 에곤 실레보다 28살이나 나이가 위시지만.. 두
사람은 유사한 점이 많았어요. 두 사람 다 부유하지 않은 집안 출신이었고 독창적인 기법을 개발해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 내셨고.. 관능적인 화풍으로 초기에는 평단의 비난과 저평가, 심지어
포르노작가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쓰셔야 했죠.
실레가 클림트 선생님을 만난 것은 16살때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해서였다고 들었어요. 그때 벌써 클림트 선생님은 40대 중반이셨죠. 실레 오빠는 빈 아카데미 입학하기 2년전에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실레 오빠에게 클림트 선생님은 예술의 동지이자 친구이자 선생님이자 아버지이신 분이죠.
실레 오빠도 저에게 한눈에 반했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매혹되어 사랑에 빠졌고, 클림트 선생님도 저를 실레
오빠의 전속모델로 일하도록 배려해 주셨어요. 우리는 실레 오빠의 화실에서 동거하다가 다음해인 1912년 아예
빈에서 떨어진 작고 한적한 마을.. 노일렝바흐로 이사를 가요. 그곳에서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작업을 하려는 거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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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ly with a red blouse>, Egon
Schille,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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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레 오빠가 저를 모델로 그린 수많은 작품 중에 직접 이름이 제목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네요. 위의 작품은 제 모습을 그린 거에요. 저는 아직 미성년일때 오빠를 만났고 사춘기를 넘어선 때부터 실레
오빠의 에로티시즘을 자극하는 영감의 원천이었어요. 우리는 부끄러운 것이 없었고 저의 모든 것을 오빠에게 다
보여줬어요. 오빠도 굳이 다른 모델을 구할 필요없이
자유롭게 저에게 포즈를 요구하고 저는 기쁘게 제 육체의 아름다움을
보여드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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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ly Neuzil>, Egon
Schi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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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생활의 여유롭고 따스함은 오빠의 창작욕을 불태웠어요. 실레 오빠의 평소 천착하던 주제인 에로티시즘에 관한 작품이 이때
쏟아져 나왔죠. 모델은 저 뿐만이 아니었어요.
저는 사실 전속 모델이자 오빠의 애인, 오빠의 아내, 오빠의 식모,
어머니, 심부름꾼의 역할을 했죠. 필요하면 그림을 손님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하고.. 오빠가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그림 외의 모든 것을 제가 도맡아 했다고 보면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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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어 있는 세미누드>, 에곤 실레,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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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은 시골로 이사오기 전에 오빠가 그린 그림인데, 한눈에
봐도 아직 어린 소녀가 자고 있는 모습을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했죠. 당시에도 아청법 (철컹철컹) 비슷한게 있었어요. 이게 곧 문제가 되지요..
우리가 이사오고 나서 마을 어린애들이 대도시에서 온 멋쟁이 화가에게
관심이 많아서 실제로 화실에 자주 놀러왔어요. 아이들은 작업실에서 자유롭게
뛰어놀았고 오빠는 그걸 그림으로 그렸죠. 근데 오빠가 그림만 그렸으면 좋은데 제 누드화를 생각없이 방치해
두고는 어린 소녀들을 모델 삼아 에로틱한 그림을 그린거에요.
오빠의 친구들도 이런 상황을 걱정해 줬지만 오빠는 "야 그렇게
따지면 발리도 미성년자야" 라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오빠는 전혀 문제될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동네 어른들을 비롯한 세상의
눈을 그렇지 않았어요.
1912년 4월 13일...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어요. 경찰과 시 공무원들이 화실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와 방안을
수색했어요. 그리고는 방안에 있던 수채화를 가리키며 음란물로 압수한다고
했어요. 오빠는 당황해서 프라하의 공식 미술전에는 이런 것보다 더 에로틱한
것도 전시했는데 무슨소리냐고 따졌어요.
바보 실레 오빠... 교활한 경찰관의 입가에 미소가 흐르는 것을
오빠는 봤을까 몰라요. 그래? 그럼 그런 그림은 어디있느냐고 올가미를 던졌어요. 오빠가 자발적으로 건넨 수많은 드로잉과 함께 오빠는 연행되어
갔어요. 저 자존심 강하지만 연약한 영혼을 가진 실레 오빠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빠가 잡혀간 첫번째 죄목은 풍기문란이었어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미성년자들을 꼬드겨 음란한 그림을 그리도록
포즈를 요구했다는 거죠.
그런데 두번째 혐의가 또 있었으니 미성년자 유괴 혐의였어요. 우리 집에 드나들던 소녀가 어느 비오는 날밤 우리 집에 와서
하루밤만 재워달라는 거에요. 저는 반대했지만 오빠는 내칠수 없다고 허락했죠. 다음날 빈에 사는 할머니 집에 가겠다고 하면서...
다음날 우린 셋이서 빈을 향했어요. 그런데 빈에 가니 소녀가 마음이
바뀌어 다시 집으로 가겠다는 거에요. 그런데 노일렝바흐로 돌아온 뒤에 소녀는 자꾸 핑계를 대면서 집에
안가려고 했고 하루밤을 더 우리집에서 묵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이의 부모가 우리집에 와서 그 소녀를 유괴했다고
하면서 법원에 고소를 해버린거죠. 그래서 미성년자 유괴란 혐의까지 쓰게 됐어요.
21일간의 유치장 생활은 오빠의 정신을 많이 갉아먹었어요.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유도 제대로 모른채 예술을 하는 자신을
파렴치범으로 몰아서 협박하는 이 사회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거죠.
결국 재판 전에 소녀의 부모가 고소를 취하해서 미성년자 유괴혐의는
벗었지만 아이들에게 음란물(저를 모델로 한 그림이네요)을 보여준 죄는 인정이
되었어요. 근데 다행히도 당시 판사님이 예술에 대한 이해가 높은 슈프펠
판사님이셨기에 추가로 3일만 더 징역을 살면 되는 파격적인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셨어요.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죠.
오빠는 옥중에서 일기를 썼어요.
"만물의 아버지, 세계이 창조자, 태양의 눈을 가진 신이여,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고문이 제게 주어지는 것을
당신이 허락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깊이 헤아려주소서"
오빠는 옥중일기와 자화상을 통해 자신은 음란물 제작자가 아니라
예술가임을 시종일관 호소했어요. 오빠는 에로틱과 외설은 전혀 다르다고 믿고 있었죠.
"내가 에로틱한 그림을 그린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예술작품이다. 비록 에로틱한 그림일지라도 그것이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면 외설은
아니다"
오빠는 자신의 그림이 외설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건 자기 잘못이
아니라 관객이 음란한 마음으로 그런 시각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인간은 엄연히 성욕을 가진 존재인데 그것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이 왜 금기인지 오빠는 도저히 이해할수가
없었죠.
사실 에로틱한 예술과 외설을 구분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죠. 외설은 오직 성적 충동을 자극해서 상업적인 이익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예술작품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외설스러운 이미지를 방법적으로 도입하는 차이겠죠.
실제로 오빠의 그림을 본다면 전혀 외설스러움을 느낄수 없을
것에요. 겉을 보면 약간 야하다는 느낌이 있을수 있지만 가만히 보면 쓸쓸함과
비애가 느껴지죠.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이 어렸을 때 얼마나 강력한 성적 충동에
시달렸는지, 음란한 상상을 했는지 치솟는 욕정으로 고통을 받았는지 죄다 잊은 것같다. 하지만 나는 잊지 않았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것은 성욕으로 인해 상상을 초월한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라고 얘기했어요.
오빠가 소녀의 육체를 빌어 에로티시즘을 구현한 것은 바로 성적 충동과 호기심을 억제하기 힘든 시절이 바로 사춘기이기
때문이죠.
두 소녀가 하반신을 드러낸채 포개져 있네요. 지금은 잠이 들었는지 어떤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지 알수
없지만 두 소녀의 붉은 옷은 성적 흥분과 욕망을 상징하죠. 내적으로 타오르는 욕망과 호기심을 어설프게 풀어내려고 하는 소녀들의
모습에서 육체적 욕망이 얼마나 사람을 번뇌에 휩싸이게 하는가 짐작하게 하는거
같아요.
오빠가 어린 소녀에 집착한 요인이 또 있는데요. 오빠의 아버지는 오랜동안 매독으로 고생하다가 오빠가 14세때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관련을 깨닫고 충격을 받은
오빠는 성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밀려드는 충동으로 혼란스러워 차라리 성겸험이 없는 미성년자에 대한 애착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르겠어요.
또하나는 빈이라는 도시의 퇴폐성도 한몫했어요. 세기말의 성적타락이 극에 달해 성매매가 기승을 부렸고 빈민층 아이들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몸을 팔고 기성새대는 원조교제에 탐닉했죠. 이런 시대적 사회적 영향도 분명 있었을 거구요..
마지막으로 오빠는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해 성에 몰입했다고
생각해요. 인간에게 성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잖아요.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과 해답을 인간의 육체, 그리고
섹스에서 찾으려 한거죠.
오빠가 그린 그림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보다는 울퉁불퉁.. 모나고 불편하고 괴이한 느낌이 드는게 사실이죠. 그래서 오빠를 표현주의 화가라고 부르는가 봐요. 표현주의란 예술가의 감정, 즉 열정과 비애, 기쁨과 고통.. 분노
등을 격렬하게 바깥으로 그림으로 표출해 내는 것이잖아요. 자신의 내부에 시선을 두고 그 감정을 작품으로 구현하는
것이죠.
이런 오빠에게 포르노 화가라는 누명을 씌운 것은 부당한
거에요. 오빠는 현실에서는 도저히 실현될수 없는 성욕을 상상 속에서 체험한
죄밖에 없으니깐요. 머리속에서 저지른 것도 죄라고 한다면 할말 없네요.
많은 사람들이 에로틱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음탕하다는 편견이
있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성에 대해 담백해요. 왜냐? 마음속에서 꿈틀대는 어두운 욕망을 그림으로 모두 배출해
버렸기 때문이죠. 이미 그의 마음은 정화가 되어 있어요.
실제로 오빠의 사생활은 문란하지 않았어요. 오빠의 친구들도 증언하고 있죠. "실레의 작품에서 풍기는 에로티시즘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활은 전혀
문란하지 않았어요. 동료 화가들도 그가 실제로 부도덕한 성관계에 탐닉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빠가 실제로 남긴 말들을 좀 적어 볼까 해요.
"내가 인간에게 한없는 연민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크나큰
슬픔이 담겨 있다는 것,
가을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 계절까지도 쇠락하는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
"예술가는 거대한 영적 재능을 지녔다. 자연현상을 다양한 관점으로
표현하는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다.
그들의 언어는 신의 언어이며, 이승에서도 천국처럼 산다."
ㅇ
ㅇ
요절한 화가 에곤 실레의 비운의 여인이었던 발리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발리가 옆에서 바라본
에곤실레의 전성기, 그리고 시련의 순간을 변호하는 입장에서 글을 써
봤어요.
이후에 에곤 실레는 발리를 배신하고 부인을 얻지요.
발리는 전쟁터에 간호사로 떠나고 전장에서 성홍열에 걸려 사망합니다.
그때 나이가 20대 초반이었구요.
허무하게도 발리가 사망한지 1년 이내에 실레의 부인과 태중의 아기,
그리고 실레 자신마저
스페인 독감으로 세상을 뜨게 됩니다.
지난번에 얼핏 포스팅한 적이 있는 실레와 발리가 헤어지는
장면..
실레의 죄의식을 담은 작품을 통해 발리가 느꼈던 감정을 상상해서
적어볼까 하다가
너무 길어질것 같아서 뒤의 이야기는 생략했어요.
원전은 이명옥 저, "센세이션 展 : 세상을 뒤흔든 천재들"과
구글링 자료등을 참조해서 작성했습니다.
에곤 실레 화가의 삶에 대해 기초지식이 없는 경우 이게 무슨 소린가
하실지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보셨는지도 좀 궁금하네요 :)
실레를 옆에서 관찰하는 것처럼... 최대한 역사적 팩트는 지어내는
것 없이
감정적인 묘사와 변호에만 제 해석을 추가했어요..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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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오빠 배바지패션 지못미ㅠ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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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에 비해 항상 미남이라는 해설이 있었는데 실제로 사진을 보니
자화상의 이미지와 크 게 다르지 않은데요. 오빠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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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 폭발의
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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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실레 오빠 컨디션 좋은날의 그림..
얼굴에 자신감이 넘치고.. 곧휴도 평소에 그리던 지워진/쪼그라진 모습이
아니고요..
신체의 왜곡도 거의 보이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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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미남이라는
건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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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빤 장난꾸러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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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스타일의 마지막 장면
같기도 하고
에반게리온 초호기를 연상시키도
하는 모습...
거울을 보며 키득거리며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던 실레 오빠의 모습이 생생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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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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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깎은 머리와 피골이 상접한 얼굴, 더러운 회색 모포..
90도로 돌아선 얼굴은 왜 지금 자유를 구속받고 있는지
언제까지 갇혀 있을지도 알수 없는 고통받고 있는 실레 자신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군요.
거울도 없이 상상만으로 그린 자화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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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술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최후까지 고통을 견딜것이다>,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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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안에서 그린 마지막 자화상입니다.
피눈물이
흘러내려 얼굴을 적시고 있고
이제는
자신이 부당하게 고난에 맞서도 있는 순교자가 되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술의 숭고함과 사랑하는 발리를 위해 언제까지 될지 모르는 기한없은 고통을 감내하리라 다짐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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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ingle Orange was the Only Light>,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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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는 실레가 옥살이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면함없는 지지자였고
보호자였고 동반자였습니다. 면회가 허용이 안되자 창문 창살 너머로 사식(오렌지)을 넣어준
모양인데요.. 실레에게는 절망의 감방에서 예술혼과 발리의 지지로
버텨나가죠.
발리의 사랑과 헌신이 담진 오렌지 한 알... 그것이 실레에게는
어두운 감방을 비추는 유일한 빛이었나 봅니다.
- Fin. -





















대담하고 자극적인 에로티시즘
답글삭제나르시시즘에 빠진 영원한 아이 - 에곤 실레